마드리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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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로그 마이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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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월급을 타고 잠옷을 샀다. 늘어난 면티에 고무줄 반바지로 반평생 당신의 잠옷을 삼으시고, 아들에게는 고급 잠옷을 입히는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일까?)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할머니 병간호에 집안일까지 하고 침대에 풀썩 쓰러지면, 그날 밤 안방에서는 귀신에게 쫒기는 듯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아침 엄마의 미간에는 어김없이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회사 근처 백화점에서 최고급의 실크원단으로 만든 잠옷을 샀다. 열대야에 적격인, 얇은 재질에 살에 닿는 촉감이 특히 좋은, 뉴욕에 지점을 두고 있는 명품 브랜드의 가장 잘나가는 잠옷이라고 했다. 생글거리는 점원의 미소가 가슴 한 구석에서 이상하게 자꾸 까끌거렸다. 서운해 할 아빠를 위해 부부용으로 구입했고 수십만 원의 결제액을 3개월 할부로 지불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정작 잠옷을 입으신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입사 후 몇 달이 지난 후였다. 첫 월급을 타자마자 집을 나왔기 때문이다. 빚쟁이로부터 도망치듯이. 체납금의 이자를 지불하듯이 나는 그 고급 실크 잠옷을 던져두고 서울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너무 부드럽고 좋다고, 푸르스름하고 회색빛의 실크 잠옷이 브라질 나비 같다고,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것 같다고. 들뜬 엄마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다 큰 장정 두 녀석이 다 나가버리니 밥값이 절약되어 좋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엄마는 실없이 자꾸 웃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양복을 입고 몇 달 만에 집에 찾아갔을 때 둘은 좁은 거실의 티비 앞에 앉아서 밤을 까고 있었다. 웅크린, 거대한 두 마리 쥐. 거실의 조명은 몇 달 사이에 유달리 어두워진 것 같았고 어둠이 면적을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집이 좁아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밤을 까는 데 집중하는 엄마의 입가에는 즐거운 주름이 졌다. 손목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고급 실크 잠옷의 소매, 레이스 장식이 반짝거렸다. 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로 다려 입은 여름용 잠옷이 차갑게 빛났다. 곰팡이 핀 동굴의 몰락한 귀족, 아니 몰락귀족의 흉내를 내는 이재민. 엄마가 웅얼거릴 때마다 입 안의 밤 조각들이 습기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온다고 해서 알이 굵은 놈으로 골라왔다고. 고소하고 달다고, 왕밤이라고, 일단 입에 넣어보기만 하면 탄성이 나올 거라고. 윗입술이 이를 덮을 힘이 모자라, 축 늘어져 주름진 아빠의 입은 명확한 소리를 내지 못하고 텅 빈 터널 언저리에서 실룩거렸다. 한기가 오는지 살진 손으로 자꾸 이불을 끌어올렸다. 마른 살결이 마른 이불에 긁혀 버석거렸다.

반을 잘라 숟가락으로 파먹으면 된다고요. 내 목소리의 공격성이 낯설다. 칼을 뺏기지 않으려는 엄마의 힘은 청년처럼 완강했다. 이내 엄마의 빈손은 맥없이 반질거리는 실크 잠옷처럼 축 늘어졌고 아빠는 멍한 눈으로 텅 빈 입에 계속 밤을 쑤셔 넣었다.

쓸데없는 소음이 작은 티비 소리 너머로 사그라들자, 침묵보다 더 조용한 고요가 찾아온다. 숟가락으로 반 잘린 밤을 파는 손이 쑥쓰럽다. 밤 껍질 안쪽에 노란 주름이 물끄러미 보인다. 텅 빈 내장 같다. 내장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부스스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부, 스, 스ㅡ.


나는 너에게 by


나는 폴스미스 빈티지 스트라이프도 페라가모 간치니 라인도 아닌 싸구려 지갑을 손에 들고 망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고등학교 일학년 때 백화점 할인매장에서 오만 오천 원에 구입해 스물여섯 가을까지 근 십 년은 족히 썼던 지금은 어딘지 기억도 나지 않는 서랍 한구석에 처박힌 지갑이었다. 비닐 사이가 해어지고 찢겨나가 누런 가죽이 삐져나오던 것과 달리 꿈속의 지갑은 매끈했다. 서늘한 그늘, 마른 흙 속에서 바스락 비집고 나온 파충류의 징그럽게 빛나는 표피처럼.

혜성의 꼬리는 그가 지옥으로부터 외면 받은 낙인이다 더럽고 축축한 녹다 만 먼지투성이 꼬리 자기 몸집의 수백 배도 더 길게 늘어진 음산한 그림자
.

나는 악취 나는 항문 뒤에 꼬리 같은 불행을 달고 다닌다
.. 

 


날조된 밀회 by


교수연구실에는 힙합음악이 큰 볼륨으로 틀어져 있었다. 영문을 모를 일이었지만, 더 이상한 일은 교수님의 옷차림이 평소와 많이 달랐던 것이었다. 그녀는 의자 대신에, 교수연구실 구석의 이불더미 같은 것 위에 다리를 한껏 꼬고 앉아 있었는데, 짧은 치마 때문에 허벅지의 가장 깊은 안쪽까지 드러났다. 흰 살결 사이, 검고 어렴풋한 그림자가 심장 안쪽을 푹 찌르듯 파고든다. 매끄러운 하체와 투명 너머의 실핏줄이 40대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할 즈음, 나를 부르며 무슨 말인가를 건넨다. 시선을 얼굴로 가져가자 나를 보고 씩 웃는다. 어깨끈을 옆으로 부드럽게 내리자 가슴이 드러났는데, 노처녀답게 김빠진 풍선 같은 가슴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모양이 탄력있게 잘 잡혀 있다. 유두는 이미 단단하게 발기되어 있다. 뾰족하게 다듬어진 손톱의 끝이 유두의 끄트머리를 약 올리듯이 간질일 때 그녀의 반쯤 뜬 눈 사이로 검게 빛나는 눈알이 내 눈과 어깨,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는다. 우아하려고 노력하는 흥분한 짐승의 허우적대는 동작이 몇 번 오고 갔고, 허겁지겁 바지를 내리려는 내 모습은 의외였다. 처음 들어오는 나를 보고 웃었던 그 같은 미소가 이번에는 투박한 나를 제지하는 데 이용된다. 뭐하는 거니, 너 지금, 여기서 어떡해, 너 바보구나. 애초에 당사자의 욕구 충족의 발로였을 행위가 이제 좌절한 어린 동물을 위로하는 이타적 몸짓으로 변모되었다. 그녀는 많은 학생들이 이곳을 들락거렸다고 했다. 내가 첫 남학생이 아니라고 했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 항상 강단에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비결, 매년 열 몇 개의 논문을 열정적으로 쏟아내고도 지치지 않는 비결, 결혼을 하지 않아도 남자에 미련을 두지 않는 비결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옷을 추스르고 벌게진 눈 주위를 천천히 문지를 즈음 다른 학생 둘이 허겁지겁 들어온다. 무언가를 들킨 것 같아 뜨끔하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나와 여교수를 한 번 훑더니, 빨리 밖으로 나가보라고 했다. 나보다 먼저,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시선이다. 시끄러운 음악은 여교수의 기대만큼이나 방음효과를 거두지 못했는지 복도를 지나가던 수많은 학생들이 이상한 신음소리를 듣고 하나둘 모여들어 이미 연구실 앞은 인산인해라고 했다. 졸업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보다 교수의 미래가 걱정이었고, 문득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태연하게 어깨끈을 올리고 후크를 채우고 있다. 아래로 내리깐 속눈썹은 아까와 같이 침착하고 색정적이다.

교수연구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나는 학구적인 목적의 방문을 갓 마친 것처럼 가장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쓴다. 그의 말처럼 연구실 앞 복도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좁은 복도를 메운 웅성거림이 동요하는 침묵 속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고 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태연함을 짐짓 꾸미는 어조에, 돌아온 대답은 무엇보다도 건조하고 담담했다.


누군가가 3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어요.


부겐빌레아 꽃송이 by


심해에 십칠 년, 이천오백오십오 일 더하기 삼천육백오십 일, 그러니까 육천백오 일 동안 잠겨 있었던 장롱에서 오랜 해류와 물고기의 토사물에 삭을 대로 삭은 옷감들 사이에서 건져낸 고모할머니의 버선처럼

아래로 아주 무겁고
소름끼치는 비린내를 풍기는




우수수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따라서 부스러 사그라지는 그의 머리카락.

파문이, 파문의 중심으로 빨려들어 작은 보조개처럼 희미해질 즈음 깊은 곳, 검은 그림자처럼 잘게, 이름을 알 수 없는 바다생물들이 한 곳으로 모여든다

새로운 소리가 가벼운 광석을 밀고 나올 때, 붉은 해초의 싹을 틔울 것이다


우리시대 슬픔의 얼굴 by


“자, 봐. 우리시대 슬픔의 얼굴이다.”

그는 눈짓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익살맞았다. 끌어올려지다가 만 듯한 입 꼬리가 볼 언저리에 아무렇게나 어색하게 매달렸다. 즐거울 때의 그의 표정이다.

구석자리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볼은 움푹 들어간, 튼 입술은 반쯤 벌어지다 만 남자가 졸고 있다. 누우런 아랫니, 썩은 내를 뻐끔뻐끔 내뱉는, 오래전에 폐유(廢油)에 담구어진 생선처럼. 번들거리는 턱에서 비린내가 난다. 악취 사이로 털이 드문드문 자라 있고, 거친 털 끝에서 무심한 벌레들이 자라난다. 헐렁거리는 바짓단은 그 속에 숨어버린 각목 같은 다리를 떠올리게 한다. 영원히 발기되지 않을 성기, 축축한 불알. 죽음에 가까이 간 성기는 꼬깃한 만 원짜리 몇 장으로 젊은 여성을 살 것이고, 그녀는 얼굴 없는 얼굴에서 비릿한 눈물을 받아 마신다. 고독한 성사(聖事). 벗겨진 이마가 슬픈 경배에 도취되었다. 30대 후반, 40대 초의 우울의 빛깔을 생각한다. 기대어 놓은 우산에서 녹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의 무력한 무릎 사이에 두꺼운 책이 위태롭게 놓여있다.

‘핵심인재’

비에 젖은 시취가 열차의 칸을 서서히 잠식한다. 바랜 전등의 색이, 냄새의 색이, 영안실 빛깔 같다.


문득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 꼬리는, 오래 전에 늙어 죽어 한없이 가벼운 물고기를 꿴 낚싯대의 끄트머리처럼, 절망 언저리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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