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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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로그 마이가든



하얀 불 by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애처로우리만큼 외로웠다. 그 쾌활한 거동에도 불구하고, 별로 감추지도 못한 채. 또한 그녀의 시들이 갖고 있는 그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역시 외로웠다. 그녀의 시들은 어느 모로 보나 여러 가지 뜻을 지닌 묘한 작업이었다. 시 속에서 그녀는 침착하게 그리고 시선을 회피하는 일 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공포와 정면으로 맞섰지만, 그렇게 하는 데에 수반되는 노력과 위험이 그녀에게 자극제와 비슷한 작용을 가했다. 사정이 더욱 악화될수록 그녀는 그것에 대해 좀 더 직접적으로 쓰게 되었고, 상상력도 좀 더 풍요로워졌다. 재앙은 그것이 마침내 닥쳐왔을 때엔, 결코 예상했던 것만큼 그렇게 극심하지는 않듯이, 그녀도 이젠 안도감을 갖고 쓸 수 있었으며, 다가올 공포에 미리 선수 치기 위해서인 양 쓰는 속도도 빨라졌다. 어떤 면에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살아오면서 내내 기다렸던 것이며, 지금 그것이 온 마당에는 그것을 스스로 이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어쩌면 그것으로부터 그녀의 시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와, 모든 것에 거역하는 섬뜩한 쾌감과, 그 거리낄 바 없음이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시가 정말 한 형태의 검은 마술인 양, 그녀가 그토록 자주, 그리고 오직 의기양양하게 물리쳐 버리기 위해 불러냈었던 그 인물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전처럼 거부할 수는 없는 최후의 모습으로 음습하게. 그 인물은 언제나처럼 그의 두 가지 모습으로 동시에 나타났다. 하나는 그녀의 아버지처럼 나이 들고 가차 없고 바로 죽은 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동시에 그보다 젊고, 보다 유혹적인 그리고 그녀 스스로 선택한 그녀 세대의 사람으로서. 이번엔 그녀가 빠져 나갈 길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전의 시들은 모두 제 나름대로, 그녀가 그 누구의 도움도 원치 않는다고 주장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돌연 깨달은 사실은 아마도 그러한 주장들은, 누군가 자발적으로 힘써 준다면 그 도움을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납득시킬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맨 처음에 그녀가 그 공포감들을 불러내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추방하려는 희망에서였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은 전능하며 난공불락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 공포감들로 포위되어 있었고 자신에게 방어할 길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썼다. <산다는 게임에서 가장 큰 판돈인 삶 자체가 걸려있지 못할 때엔 삶의 흥미는 줄어든다.> 실비아는 거기에 도박을 걸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승산이 자기편에 있음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그러나 아마도 그녀의 암울한 마음이 이기든 지든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그녀는 최후의 내기를 걸었다. 그녀의 계산은 빗나갔고 그녀는 졌다.’

- A. Albarez, 『자살의 연구』



하얀 꿈 by


‘한밤중에 문득 깨면 모든 것이 그렇게 아득할 수 없다. 나 혼자 어둠 속에 내던져져 있고 아득히 먼 곳에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환영을 본다.’

‘이 방은 방이 아니야. 피 흘리는 작은 양을 잠재우고 놀라 뛰는 가슴을 쉬게 하고 내 푸른 단도 날까지 어루만져 주는 방이 필요해. 아니 그러한 방은 내게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단순한 구도로 명료하게 묘사된 듯한 고흐의 ‘아를의 침실’도 휴식보다 불안을 느끼게 한다. 퇴색한 듯한 거친 적갈색 마룻바닥과 하얗게 반짝이고 있을 뿐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거울. 빨간 담요……. (...) 헛된 것 중에 가장 헛된 것, 그것은 감각이다. 아스트린젠트의 향내 같은 것.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감각일 뿐이다.’

‘여기는 꿈이 아니야. 날개는 없고 몸뚱이만 있는 척박한 땅이야. 새가 아니고 나비가 아니고 땅을 전신으로 문지르고 다니는 뱀이야 날개는 환각이야 깨어지면 아프고 괴롭고 추한 몸뚱이야 (...) 나는 섬이야 어디와도 닿지 않는 함정 같은 섬이야’

 -『숲속의 방』, 강석경



벽 안에서 by


‘하민지씨요?’

그가 되물었다.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발음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그마한 꼬리를 보일듯말 듯 살랑거리며 서성거리지만, 땀에 젖은 손을 조금이라도 뻗으려 들면 멀리 달아나 버리는 그런 존재.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나는 그 꼬리가 지나간 동선을 정성스럽게 기억했고 미래의 동선을 그리며 그 잔상 속에서 조바심쳤다. 꼬리 아래에 숨겨진 은밀한 어떤 것, 비웃는 듯한 요염한 속삭임. 그녀는 결코 원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나를 관찰하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바싹 말라서 움푹 패인 구멍이 송송 뚫린, 그런 작고 차가운 위성처럼 나는 자꾸만 말라갔다.

‘글쎄요..’

그는 그 이름을 입에 넣고 씹듯이 음미하는 것 같이 보였다.

‘민지씨는 자아가 너무 쎄죠. 자아가 쎈 여자들이 오히려 쉬울지도 몰라요. 이런 말을 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민지씨가 꼬시기 어려운 여자라는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그는 말을 잇기 전 잠시 주저하는 듯했다. 자신의 주제넘은 단언에 대한 자조를 꼽씹는지도 몰랐다.

단지 그들의 조바심을 뺏어버리면 되거든요.’

그는 ‘조- 바- 심’이라는 단어를 음절을 끊어 비밀스럽게 발음했다. 여름밤 풀잎 아래, 잔 벌레의 속삭임처럼. 그 속삭임 앞에서 나는 조금 다급해지는 것 같았다.

‘그 조바심이라는 걸 뭘로 어떻게 빼앗는단 말입니까?’

‘침묵이죠.’

그의 눈동자가 투명해졌다. 그 투명한 눈동자가 검은 입술을 조용히, 벌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침묵은 당황하거나 긴장했을 때의 침묵이어서는 안 돼요. 그 침묵은 언어로 가득 찬 침묵이어야 해요. 그리고 그 언어는 상징으로 가득 찬 언어여야 하죠.’


나는 왠지 불쾌해졌다. 옆 테이블로 눈길을 돌렸다. 한참 수다를 나누던 연인은 막 일어나는 중이었고, 여자는 남자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아 쫌만, 신발 좀 제대로 신고. 나 꾸겨신는 거 싫어한단 말야.’

꾸겨신는 게 왜 싫어. 그냥 대충 신고 나가면 되지.’

한번 꾸겨신으면 계속 꾸겨신어야 한단 말이야.’

남자는 발뒤꿈치에 검지손가락을 대고 조금은 작아보이는 신발에 발을 비집고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가만 보고 있으려니 내 손가락 끝이 괜히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일어나서 카페의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늘 뒤로 카페의 문이 닫히며, 여름의 더운 바람을 부드럽게 부스러뜨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다시 테이블 앞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그는 두 팔을 테이블 아래로 늘어뜨리고 목을 길게 빼서 자기 앞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이처럼 빨아먹고 있었다. 그 이상한 천진함이 그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하게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맛있어요?, 하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쪼로록, 쪼로로록.’

마른 빨대 끝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났다.


벽 앞에서 by


몇 개의 꿈을 연달아 꾼 기분이다. 현실에서는 삼 일이라는 시간밖에 흐르지 못했다. 한참 꿈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새벽에 깨었을 때 불과, 십오 분밖에 흐르지 않은 것처럼 그 시차는 세상에 없는 새파란 공기처럼 나를 붙드는 것 같다. 수많은 시간들은 서로 해어지고 흩어지고 파손되었으며 동시에 서로 중첩되고 으스러지며 각자의 축축한 습기를 나누었었다. 그들의 신음소리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고 내 목 깊은 곳은 그 소리를 감당하느라 찢겨져 나갔거나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어 꺽꺽거리는 소리만 머리 뒤쪽에서 울렸는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나는 낯선 이들과 말을 섞었고 비밀스런 눈빛을 교환하였고 때론 몸을 섞었고 한 여자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목놓아 외쳤고 누군가와는 달콤한 침묵을 섞었거나 아무것도 섞지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삶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 시간에게 손짓할 수 없었고 그 시간이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도록 서글프게 방임하고만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온통 새까만 눈과 무표정하게 벌린 입과 때때로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소리 없는 입술의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곧 우울의 밑바닥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존재가 되어, 나는 그 존재의 낯설음에 몸서리치며 그를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는 그를 죽일 수 없었으며 태연자약하게 살아있는 것을 가만히 볼 수도 없었으며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희멀건 눈동자를 기계적으로 감았다 떴다하는 것뿐이었다.

.


흐리다. 희미한 무형의 막이 나를 완전히 덮어 그 막들이 빚어내는 형상 속에서 나의 모습이 새롭게 그려진다. 그 먹먹한 거푸집 속에서 나는 몸을 둥그렇게 말아 한껏 웅크리고 조용히 헐떡이다가, 꿈 바깥으로 손을 조용히 뻗었고,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벚꽃이 하루만에 붉게 피었다고 했다.


by

첫 월급을 타고 잠옷을 샀다. 늘어난 면티에 고무줄 반바지로 반평생 당신의 잠옷을 삼으시고, 아들에게는 고급 잠옷을 입히는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일까?)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할머니 병간호에 집안일까지 하고 침대에 풀썩 쓰러지면, 그날 밤 안방에서는 귀신에게 쫒기는 듯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아침 엄마의 미간에는 어김없이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회사 근처 백화점에서 최고급의 실크원단으로 만든 잠옷을 샀다. 열대야에 적격인, 얇은 재질에 살에 닿는 촉감이 특히 좋은, 뉴욕에 지점을 두고 있는 명품 브랜드의 가장 잘나가는 잠옷이라고 했다. 생글거리는 점원의 미소가 가슴 한 구석에서 이상하게 자꾸 까끌거렸다. 서운해 할 아빠를 위해 부부용으로 구입했고 수십만 원의 결제액을 3개월 할부로 지불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정작 잠옷을 입으신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입사 후 몇 달이 지난 후였다. 첫 월급을 타자마자 집을 나왔기 때문이다. 빚쟁이로부터 도망치듯이. 체납금의 이자를 지불하듯이 나는 그 고급 실크 잠옷을 던져두고 서울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너무 부드럽고 좋다고, 푸르스름하고 회색빛의 실크 잠옷이 브라질 나비 같다고,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것 같다고. 들뜬 엄마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다 큰 장정 두 녀석이 다 나가버리니 밥값이 절약되어 좋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엄마는 실없이 자꾸 웃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양복을 입고 몇 달 만에 집에 찾아갔을 때 둘은 좁은 거실의 티비 앞에 앉아서 밤을 까고 있었다. 웅크린, 거대한 두 마리 쥐. 거실의 조명은 몇 달 사이에 유달리 어두워진 것 같았고 어둠이 면적을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집이 좁아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밤을 까는 데 집중하는 엄마의 입가에는 즐거운 주름이 졌다. 손목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고급 실크 잠옷의 소매, 레이스 장식이 반짝거렸다. 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로 다려 입은 여름용 잠옷이 차갑게 빛났다. 곰팡이 핀 동굴의 몰락한 귀족, 아니 몰락귀족의 흉내를 내는 이재민. 엄마가 웅얼거릴 때마다 입 안의 밤 조각들이 습기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온다고 해서 알이 굵은 놈으로 골라왔다고. 고소하고 달다고, 왕밤이라고, 일단 입에 넣어보기만 하면 탄성이 나올 거라고. 윗입술이 이를 덮을 힘이 모자라, 축 늘어져 주름진 아빠의 입은 명확한 소리를 내지 못하고 텅 빈 터널 언저리에서 실룩거렸다. 한기가 오는지 살진 손으로 자꾸 이불을 끌어올렸다. 마른 살결이 마른 이불에 긁혀 버석거렸다.

반을 잘라 숟가락으로 파먹으면 된다고요. 내 목소리의 공격성이 낯설다. 칼을 뺏기지 않으려는 엄마의 힘은 청년처럼 완강했다. 이내 엄마의 빈손은 맥없이 반질거리는 실크 잠옷처럼 축 늘어졌고 아빠는 멍한 눈으로 텅 빈 입에 계속 밤을 쑤셔 넣었다.

쓸데없는 소음이 작은 티비 소리 너머로 사그라들자, 침묵보다 더 조용한 고요가 찾아온다. 숟가락으로 반 잘린 밤을 파는 손이 쑥쓰럽다. 밤 껍질 안쪽에 노란 주름이 물끄러미 보인다. 텅 빈 내장 같다. 내장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부스스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부, 스, 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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