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오닉스를 얻었고 이제 블루 오닉스를 찾으러 떠날 차례다. 그러니까 나는 열 살 때 모으던 오닉스를 지금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오늘 시험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블랙 오닉스 먹는 데까지 거의 다 갔었는데, 깜빡 잊고 대마법사 사루만에게 들르지 않아서 중간부터 다시 하게 되었다. 마법대학교 학장인, 대마법사 사루만에게 꼭 들러야 마법시약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게 있어야 전설의 칼인 ‘스톤커터(직역하면 돌 자르는 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만나게 될 주인공의 라이벌, 프란시스가 ‘샤킨’이라는 명검을 쓰기 때문에, 주인공이 그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꼭 ‘스톤커터’가 필요하다는 것이 사악한 악마 드라이덴의 불기둥을 맞고 죽은 대마도사 레자일의 유언이었다. 그 칼을 만들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마법시약과 운석파편, 그리고 숙련된 드워프 대장장이의 솜씨가 필요한데, 그 긴 노고 끝에 막상 이 칼을 들고 프란시스를 무찌르러 가면 그는 싸우지도 않고 가만히 맞기만 한다. 자신의 연인이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가만히 볼 수밖에 없었던 슬픔 때문에 자신은 칼을 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잔인한 주인공은 새 칼을 시험할 셈이었는지 라이벌이 가만히 있든 말든, 혼자 지껄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돌 자르는 칼로 그냥 죽여 버린다.
오닉스 이야기를 하니, 잊고 있었던 옛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다섯 살 위의 형이 만화를 워낙 잘 그렸었는데, 심심할 때마다 멋모르고 형 그림을 따라 그리기만 했는데도 나는 언제나 반에서 만화 제일 잘 그리는 아이였다. 오학년 때였나, 공개적으로 내가 좋다고 떠벌리고 다녔던 같은 반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아주 말괄량이였다. 문득 지금 떠올려봐도 오학년 때는 내 전성기였다. 나 좋다고 했던 아이만 반에서 일곱 명이었다. 반장도 아니고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참 신통하다. 아무튼 그 중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걔가 장문의 편지를 내게 써서 주면 나는 읽지도 않고, 놀리기 좋아하는 무리들에게 ‘너네나 실컷 읽어라’하고 등 뒤로 던져주는 뼛속까지 나쁜 남자였다. 그러면 걔네는 이상한 여우 울음소리 같은 걸 내면서 실내화 발로 교실을 뛰어다니며 큰 소리로 편지를 읽곤 했다. 육학년 땐가, 내 짝꿍이었던 여자 아이의 얼굴을 곰보딱지로 만들어 야한 그림을 그려놓고 수업시간에 몰래 애들에게 돌렸던 기억도 있다. 그것은 잊고 있었던 기억인데, 나중에 나이를 먹고 동네 치킨집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걔가 이야기 해 준 것이다. 나는 요전 문장을 쓰면서 솔직하지 못했다. 사실 비오는 날 친구와 동네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 아이들에게 합석을 요구했던 적이 있다. 살살 눈치를 살피는 와중에, 그 중에 한 명이 자꾸 나를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고, 그래서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서 용기를 냈던 것이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뻔한 수작의 말을 주워섬기자, 그 여자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전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한 눈빛이었다. 내 말이 다 끝나고, 한참을 내 얼굴을 보던 그녀는 웃음인지 구토증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호프집의 손님들에게까지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야, 6학년 5반 XX!'
초등학교 동창에게 헌팅이랍시고 들이댄 것이었다. 이만한 개망신이 따로 없었다. 아무튼 초등학교 때는 어른스럽고 이해심이 많던, 큰누나같은 아이였는데, 다 크고 만나니 술집 여자가 다 되어 있었다. 알콜을 습관적으로 먹어댔는지 말투에서, 뇌가 조금 녹은 아이의 어조가 묻어났다. 이후에 전화를 몇 번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할 때마다 유흥가에서 남자랑 단둘이 술을 마시고 있다고 했다.
오닉스 이야기를 하다가 또 삼천포로 샜다. 어린 시절 그렇게 오닉스를 모으다가, 안 되겠다 나도 오닉스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그 게임을 소개해준 아이는 돋보기 안경에, 오서방 위치에 거대한 점이 있는, 겉보기에도 오덕인 아이였는데, 그 아이와 같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나름대로 현명했던 우리는, 창작 과정에서 트러블이 생기지 않기 위해 각자 대표 주인공을 한 명씩 만들었다. 내가 만든 주인공의 이름은 ‘암화’였는데, 내 이름에 모음 하나씩을 더한 것이다. 검은 머리에 야윈 몸, 흰 도복에 긴 일본도를 쓰는 전형적인 동양무사 캐릭터였다. 친구가 만든 주인공은 당시 열풍이었던 드래곤볼의 초사이어인 손오공 머리, 그러니까 금색으로 뾰족뾰족 솟은 머리에 이름은 ‘COOL'이었는데 말할 것도 없이 재수 없는 뻔한 백인 간지남 캐릭터였다. 캐릭터도 이름도, 어린 나이에도 참 유치하고 한심하다, 혀를 찼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는 자를 대고 컷을 나눠 만화를 분담해서 그렸는데, 수업 시간에는 몰래 그림을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열띤 토론을 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야 오늘은 이 노트 내가 가져갈게’, 하고 말하고 집에 가서 열심히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러니까 뭐 결론은 오닉스를 모으는 이야기였다. 암화와 쿨을 비롯하여 총 열 명 정도의 주인공이 있었는데, 물론 그 가운데에 애틋한 러브라인이 형성되도록 했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다른 차원에서 이 세계로 건너온 영웅들이었는데, 원래의 힘을 찾기 위해서는 각 인물들마다 자신들의 고유의 힘이 봉인된 오닉스를 찾아야만 했다. 각 주인공들마다 고유의 색깔이 있었다. 암화는 블랙 오닉스를 찾아야 했고, 쿨은 골드 오닉스를 구해야만 봉인된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레드 오닉스와 화이트 오닉스의 영웅들도 뭔가 아주 중요한 비중이 있는 캐릭터들이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오닉스 모으는 이야기 만드는 데 정신이 없었다. 오닉스는 끝이 없었다. 오닉스는 계속되었다. 기억나는 건, 노란 장판 바닥에 배 깔고 엎드려, 밤 부터 새벽까지, 드라큐라 백작을 처단하러 가는 에피소드를 썼던 것이다. 그림 일일이 그리기가 귀찮아 드라큐라 백작 챕터는 그냥 글로만 두서너 페이지를 쭉 써내려갔는데,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그 오덕 친구는 내가 너무 독단적이라며 이야기가 원래의 흐름에서 너무 벗어났다고 했다. 녀석의 유치함이 진작부터 못마땅했던 나는, 그럼 우리 이 만화는 깨끗이 접고 앞으로 각자 작업을 하기로 쉽게 합의했다.
그날부터 나는 ‘슈퍼 또랑꾸’라는 만화를 새롭게 그리기 시작했다. 주인공인 ‘또랑꾸’가 뭘 찾아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인데, 뭘 찾아 떠났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또랑꾸는 암화보다 어리고 철이 없으며 순박한 꼬마 전사였다. 또랑꾸는 자신의 호위정령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는 애완-수호신 같은 걸 부리는데, 그 녀석의 이름은 ‘아웅졸려’였다. 캐스퍼처럼 동그랗고 작은 유령인데 맨날 졸리다고 하품을 하는 것이 컨셉이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우연찮게 위기를 모면하게 하는 수호귀신이었다. ‘슈퍼 또랑꾸’가 탄력을 받아, 아름다운 여주인공 ‘이아신스’도 만나고 하니까, 반 아이들의 주목을 얻기 시작했다. 반에서 ‘슈퍼 또랑꾸’를 돌려보는 게 인기가 된 것이다. 자꾸 그렇게 돌려보겠다고 하니까 새로운 에피소드를 그릴 수 없었고, 왜 새로운 에피소드가 진행이 안 되냐는 독촉에 시달려야 했다. 그쯤되자 오덕친구는 조용히 나를 교실 뒤로 불러내었다. 멋쩍은 표정이었다. 다시 공동작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마음이 이미 멀찍이 떠난 나는, 도와주는 척을 조금 하다가 금방 발을 뺐다. 녀석의 유치함은 여전했고, 발전의 기미는 없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성이 '현'씨였던 것 뿐. 그 녀석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것보다 내 찬란한 유년의 흔적, ‘슈퍼 또랑꾸’를 어딘가로 완전히 잃어버려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정말로 안타깝다.
기억은 자꾸만 거슬러간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그러니까 이사도 오기 전에, 개봉동에서 국민학교 1학년 무렵에, 계기는 생각이 안 나지만 뭔가를 또 장황하게 썼던 기억이 있다. 김일성(요새 아이들에게는 역사 속의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 당시에 김일성은 건재했다)이 일본 놈을 잔뜩 이끌고 한국을 침략해 한국의 뛰어난 장군들이 맞서 싸우기 위해 중지를 모아 탱크, 우주선, 처녀귀신, 레이저포를 총동원해 방어하는 이야기였는데, 왜 김일성이 일본 놈의 우두머리인가 생각해보니, 그 당시는 뭐 국가 개념도 없고 해서 세상은 나쁜 놈하고 착한 놈 둘로 나뉘어 졌는데, 일본도 나쁘고 북한도 나쁘니까, 그 나쁜 놈들이 구분이 안 되고 한꺼번에 섞여 김일성이 졸지에 일본 놈이 된 것이었다. 젊은 여선생님이었던 담임선생님은 김일성은 일본이 아니고 북한 사람이야, 라고 상냥하게 말씀을 주신 뒤 이야기가 매우 재미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그 이후로 반 아이들은, 쟤는 뭔가 특별한 재주를 가진 아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높게 평가했다.
그것이 시작이었을까. 그런데 난 왜 이리 진지하기만 한가. 거짓된 진지함은 솔직한 가벼움보다 나을 게 없을 텐데.




덧글
척척박사님 2011/05/26 00:49 # 답글
거짓된 진지함이 가능합니까? 그나저나 귀엽게 사셨네요.
안개인간 2011/05/26 02:22 #
아다르고 어다르겠지만, 진지함이 때론 날조될 수 있다는 거죠. 흔하디 흔한 감정 과잉이라든가.. 마조히즘적 (정신적) 자기학대라든가..
음l탕웨이 2011/05/28 06:24 # 답글
아 매우 인간적이네요ㅎ참고로 저 다중인격놀이하는 거 아닙니닼ㅋㅋㅋ
안개인간 2011/05/29 02:49 #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탕웨이를.. 안타깝습니다. 떡방아 찧는 소리가 정말 경쾌하군요.
조각가J 2011/05/28 13:18 # 답글
잘 보고 가요 :)